중세 시대는 서양 역사에서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어진 시기로, 여러 사회적 변화와 역동성이 일어났다. 중세 초기에는 로마 제국의 붕괴로 인해 침체기를 겪었으나, 이후 농경 기술의 발전과 신호로우적인 변화 등이 중세 사회의 특징이었다. 동방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상업 도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지중해와 동방 사이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도시의 중요성이 증가했다.
# 중세 사회의 역동성 : 상업과 도시의 성장
봉건사회의 제도적 틀이 확립되면서 중세 유럽은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했으며,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속에서 문화도 발전했다. 10세기 말경 봉건사회가 정착되면서 서유럽에서는 농업기술상의 혁신이 나타나고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11세기에는 대대적인 개간운동이 일어나면서 봉건사회가 엘베 강 동쪽의 동유럽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당시 생산성 확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술 향상이라기보다는 경작지 면적 확대였다. 따라서 중세 유럽의 농업은 '질적인 확대'가 아니라 '양적인 확대'에 의존한 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화는 생산 증대에 따른 중세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출현이다. 특히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으로 유입된 향료와 비단 등의 사치품은 영주의 욕구를 부추겼으며, 동방의 물품과 교환할 모직물 산업의 발달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이탈리아 항구도시와 플랑드르 및 북독일 지역의 도시가 발전하고 유럽 각지에는 시장의 그물망이 확산되었다. 도시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도시공동체 투쟁에 앞장섰던 길드였다. 길드는 한편으로 모든 성원의 생계기반이 유지될 수 있도록 경제활동을 독점했다. 또한 성원 상호 간의 평등과 상부상조를 목표로 자유경쟁을 억제하고 생산과정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길드의 규제는 당시 협소했던 경제규모에 합당했으나 기술혁신을 억제하여 중세 말 경제침체와 사회불안을 심화시키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화폐와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는 기존의 자급자족적인 농촌사회와는 이질적인 성격을 띠고 중세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신속함을 요구하는 상업활동은 농촌 중심으로 완만하게 진행되던 영주의 통치 틀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도시민들은 시민 상호 간의 서약으로 도시공동체를 이루고 투쟁하여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영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경제활동의 자유 및 정치적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중세 도시는 농노의 지위 향상에 기여하면서 장원제를 변화, 해체시키기도 했다. 도시 상품을 원한 영주들은 노동지대보다는 현물지대나 화폐지대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역을 폐지하고 지대 납부를 조건으로 영주 직영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자극했다. 여기서 아주 미약하나마 일종의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의 기초가 수립되었다. 게다가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장원으로부터 도망 나온 농노는 도시에서 1년 1일을 살면 영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구래의 '공동체적 권리'를 기반으로 한 영주와의 거래 혹은 저항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제반 발전은 유럽인들에게 부에 대한 욕구와 외부, 특히 풍요로운 동방세계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자극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의 수중에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코자 했던 십자군전쟁으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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