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일어났으며 11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생했다.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지역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향해 출발한 유럽의 기독교 신도들의 군사적 움직임을 이야기한다.
# 십자군전쟁
13세기가 끝나 갈 무렵에 교회세력은 쇠토의 양상을 보인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교회세력뿐만 아니라 세속군주, 봉건귀족, 상인 등의 합세로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전쟁이었다. 십자군전쟁의 발단은 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점령이었다.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한 동로마제국 황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1096년 십자군전쟁이 시작되었다.
십자군전쟁의 명분은 성지 탈환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동서교회의 통합 및 기독교 세력의 확장도 추구되었다. 그러나 세속 통치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상인들의 이해관계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에 이른다. 십자군은 일단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결실도 없는 전쟁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차츰 식고 세속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심지어 1204년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의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제휴하여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제국을 세우기까지 했다. 전쟁은 단순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서 서방 가톨릭과 동방정교, 가톨릭 교황과 세속군주, 각 지역의 군주들, 심지어는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갈등과 권모술수가 많은 혼란과 상처를 야기했다.
십자군전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십자군전쟁을 주도한 교황권이 실추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위축되었으며, 기사층의 인명 피해로 봉건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세속권력으로서의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교회에 대한 반격을 본격화하면서 점차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군주뿐만 아니라 십자군전쟁 이후 목락의 길을 걸었던 봉건귀족들은 노골적으로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탐하였다. 게다가 동방세계와의 접촉으로 유입된 고전 문헌은 신선한 문화적 자극을 가하였다. 또한 교류를 통한 물자수송과 동서 간의 교역 확대는 상업과 도시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으며,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원거리 무역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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