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가 되어 로마 제정을 수립했다.
로마제정의 수립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일의 시민, 곧 프린켑스(princeps)를 자처하면서 공화정을 회복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의 세력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다. 그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국경 방비에 힘쓰며, 세제개혁, 속주 통치체제의 정비, 곡물의 무상분배 등을 실시하고, 대형경기장인 콜로세움, 기념비, 고층의 공동아파트, 공동목욕탕과 같은 대규모 공공건물을 건설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 또한 친위대를 설립하여 치안유지에 주력했다.
이후 약 200년 동안 풍요와 사회적 안정이 유지된 로마의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위장된 평화에 불과했다. 중소농민의 몰락, 격심한 빈부격차, 도시의 빈민층, 노예노동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정복전쟁의 전리품과 강력한 군사력 및 교묘한 행정력으로 은폐되었다. 또한 곡물의 무상분배와 투우등의 오락과 같은 이른바 빵과 서커스 정책은 시민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켰다.
로마제정의 전개
로마는 기원후 2세기경 행정력이 약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군인들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하여 정권다툼을 벌였다.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군인황제(Barrack Emperor, 235~285)의 시대에는 혼란과 쇠퇴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로마 쇠퇴의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경제적 침체에 있었다. 정복전쟁의 중단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말미암아 노예가 수적으로 감소하고 생산성이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노예노동과 라티푼디움의 경영이 어려워졌다.
이제 라티푼디움에 대신하여 콜로누스(Colonus, 소작인) 제도가 새롭게 나타났다. 이는 대토지를 소작인에게 소규모로 분할, 대여하여 경작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결과적으로 상업적인 작물보다는 곡물경작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로의 이행이 가속화되었다. 소작인은 대지주에 종속되어 지대를 납부했는데, 로마의 소작인은 거주 이전의 자유는 없지만 독립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세 농노의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경제적 쇠퇴는
도시에도 나타났다. 노예 공급의 감소,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소비시장이 축소하고 도시수공업도 위축되었다. 특히 관리직에까지 일반화된 노예의 존재는 정책의 경직성을 초래하여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했다.
위기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까지 확산되었다. 로마는 재정적 궁핍과 농민폭동, 비적 떼의 출현과 같은 내란, 그리고 게르만족의 침입과 같은 외환 등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미 통제 계통이 무너진 군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변경의 수비를 게르만의 용병에게 맡기는 일까지 나타났다. 3세기 말엽과 4세기 초엽,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여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을 4 등분하여 각기 별도로 통치하는 4 분치제를 통하여 군사력과 행정력, 그리고 징세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여(313) 로마인들의 정신적인 안정과 통합을 꾀하였다.
그러나 전제군주제의 시도는 단기적인 효과에 그쳤을 뿐이다. 효율적인 행정을 위한 분할통치제는 오히려 동. 서로마의 영구적인 분열을 초래했으며,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중대된 관료와 군사기구는 그나마 취약한 로마의 사회. 경제구조를 더욱 짓눌렀다. 특히 무리한 강제징세는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도시수공업자들은 농촌으로 도피하고 농민들은 국가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유력자의 보호 속으로 숨어들었다. 또한 관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교회성직자들의 집단이 비대해지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확립했지만(395), 바로 그해에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 곧 비잔틴제국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5세기말에 서로마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로마의 전체적인 단결을 가능케 했던 건전한 시민정신은 소멸되었다. 귀족은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향락과 낭비에 점점 젖어들었으며, 생산에서 소외된 무산시민은 무기력하고 부도덕한 기생집단으로 전락했다. 여기서 사회는 전체적인 침체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런 점에서 게르만의 침입은 로마 멸망의 계기를 이루기는 했으나 그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으며, 흔히 로마 시민의 건전한 기풍을 약화시켰다고 비난받는 기독교의 유입 역시 그 쇠퇴의 상징적 현상일 뿐이다. 이미 기반이 붕괴된 로마 사회는 몰락의 길로 치달았으며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몰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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