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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유럽.미국의 역사]로마공화정의 전개

by 이쉬하라 2023. 6. 10.

로마 공화정은 로마의 초기 정치 체제로, 약 509년부터 27년까지 약 482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로마는 공화제로서 국가를 운영하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공론장, 균형 있는 권력분립의 원리를 일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화제는 로마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한 509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로마공화정의전개
로마공화정의전개

 

1. 로마공화정의 전개

① 로마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에 라틴족이 세운 조그마한 폴리스로 출발했다. 6세기말 공화정을 수립한 로마인들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이어서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에 걸쳐서 진행된 포에니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서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기원전 1세기말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리스계의 로마사가였던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팽창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강력한 시민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② 로마공화정

로마공화정은 팽창의 명분으로 신분투쟁의 과정에서 평민들의 항의를 달래고, 그들로부터 군사력과 세원을 확보하여 대외적인 위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로마의 팽창정책은 과두적, 귀족적 구조로 말미암은 사회의 내적인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로마공화정의 정치적 참여권은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대지주 귀족들, 곧 원로원에 독점되었다. 대부분 중소자영농이던 평민들은 점차 불만과 항의를 표출했다. 평민들은 2세기에 걸친 긴 투쟁, 이른바 신분투쟁을 통하여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 형식상 귀족들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평민들의 신분상승은 부유한 상층부에만 한정되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에 충원되고 귀족층에 흡수되어 벌족(nobiles)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이루었다. 반면 여타 평민들의 처지는 나아진 바가 없었다.

 

③ 정복전쟁

오랜 정복전쟁, 특히 해외에서 진행된 포에니전쟁에 종군하는 동안 로마의 중소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방치된 농토는 황폐해졌다. 귀족과 정복전쟁에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새로운 유력자들은 평민의 토지를 매점했고, 피정복 노예노동에 입각한 대농장 경영, 곧 라티푼디움 제도를 수립했다. 여기서 지주들은 목장을 경영하거나 과일, 채소 등의 상업성 작물을 경작하였다. 라티푼디움의 수립으로 중소자영농들은 토지를 잃고 무산자, 곧 자식을 낳는 것 이외에는 국가에 전혀 기여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가 되었다. 이들은 농촌을 버리고 로마 시로 흘러 들어와 교외에 무리를 이루어 살면서 기아, 치안문제, 질병, 화재 등 사회불안의 요소를 야기했다. 한편으로 중소자영농의 몰락은 토지소유 농민층에 의존하던 로마 시민군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를 우려한 그라쿠스 형제는 기원전 133년과 123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토지소유 농민을 부활시키고자 개혁을 추구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시민군이 와해된 이후 로마의 군대는 정복전쟁으로 재력을 확보한 군사적인 유력자들의 권력을 지켜 주기 위한 사병집단으로 전락했고, 이를 배경으로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였다. 토지를 잃고 농촌에서 도시로 대거 유입된 빈민들은 군인 정치가들의 권력투쟁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동원되었다. 도시 빈민들은 정복전쟁의 혜택을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원로원 귀족보다는 곡물 등의 전리품을 분배한 군인들을 선호했다.

 

④ 군인정치가들

군인 정치가들은 그들의 군사력과 재력 및 도시 빈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투쟁을 벌였다. 기원전 80년에는 벌족파인 술라와 평민파인 마리우스가 대립했고, 기원전 60년에는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가 세력을 겨룬 제1차 3두 정치가  진행되었다. 이 중 카이사르는 독재권의 확립을 꾀하다가 브루투스 등 공화정 수호자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도시 대중은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에도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카이사르파인 옥타비아누스, 아토니우스, 레피두스 등을 지지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43년 이 세 사람 사이에 제2차 3두 정치가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세력 근거지로 삼았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가 대결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지중해세계를 통일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