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의 역사

[유럽.미국의 역사]폴리스와 고대 그리스문명-2

by 이쉬하라 2023. 6. 8.

폴리스(Polis)는 고대 그리스에서 독립된 도시국가를 의미하며, 다양한 형태의 정치 체제가 존재했다. 폴리스 중에서는 민주정을 추구하고 균형을 이룬 경우도 있었지만, 동시에 귀족적인 특성을 유지하거나 군사적인 특색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폴리스와 고대그리스문명-2편
폴리스와 고대그리스문명-2편

1. 폴리스와 고대 그리스문명 2편

폴리스 중에는 철저한 민주정으로 나아간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귀족정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정복민인 도리아인들이 세운 스파르타는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도리아인들은 소수(5~10%)의 시민, 곧 스파르타인을 이루었다. 이들은 피정복민 노예인 헤일로타이(heliotai)와 주변인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위에 군림하면서 감시와 탄압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전 시민의 전사화에 입각한 군국주의적인 국제를 수립했으며 중장보병제를 가장 먼저 채택하기도 했다.

 

① 스파르타 체제

스파르타의 체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귀족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스파르타 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철저한 민주정이기도 했다. 스파르타 시민은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훈련되었으며, 20세부터 60세까지 의무적인 병영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균등한 규모로 토지를 분배받았는데, 이는 헤일로타이에 의해 경작되었다. 여러 면에서 상호 동등했던 스파르타 시민들은 소박하고 건전한 공동체적인 관습과 덕목을 통해 결속을 강화했다. 스파르타의 정치와 사회체제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되어 정치적 소요로 시달리던 인근 그리스인들의 동경을 받았다.

 

② 아테네

아테네는 침입자인 도리아인들에 대한 자기 방어의 필요에서 자발적으로 수립된 공동체로서 가장 전형적인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아테네 인들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여 상공업을 발달시켰으나, 빈부의 차가 심각해지면서 부채노예로 전략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기원전 594년 조정자 솔론(Solon)은 금권정치를 실시하여, 부채노예를 금하고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4 등분하여 저치참여권에 차등을 두었다. 하지만 제한된 조정에 귀족과 평민 모두 만족하지 못했다.

 

금권정치를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극심한 대립은 참주정 수립의 배경을 이루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61년 빈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귀족의 행정적 실권을 무너뜨렸다. 그는 토지분배, 상공업 장려, 대규모 토목공사와 공공제전 등을 통해 민중의 이익을 옹호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교묘한 통치에 입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의 능력과 기지에 의존하는 참주정은 붕괴되기에 이른다.

 

참주정이 붕괴한 이후 귀족은 참주 등장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이미 민중은 참주정을 통하여 의식과 세력이 성장해 있었다. 이에 평민파 귀족인 크레이스테네스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민주적인 행정개혁(기원전 502)을 단행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우선 귀족지배의 기반이 되었던 4개의 혈연 부족을 해체한다. 그리고 민중의 자치구역이었던 데모스를 기반으로 아테네 전역을 10개의 행정북족으로 구성했다. 이후 데모스는 자체의 민회와 구민명부를 보유하면서 민중에 의한 정치인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아테네의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는 최종의결권을 행사했다. 이 외에도 행정관 및 재판관 등의 관리들은 각 행정 부족별로 추첨에 의해 충원되었다.

 

민주적이라는 아테네 정치체제에도 내부적인 한계와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관료집단이 결여되어 항구적인 정책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으며, 유력하고 부유한 인물이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추첨과 선거의 병행은 아테네 정치체제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특히 국정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던 10인의 장군은 민회에서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지만 연임이 가능했다. 기원전 5세기 후엽 전성기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정은 외국인과 노예, 그리고 여성들을 제외한 성인 남성에게만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하여, 그 참여의 폭이 극히 제한된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노예노동은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가능하도록 여가를 제공해 주었다.

 

③ 그리스의 폴리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상호 경쟁하는 체제였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협동의 묘를 발휘하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제국은 지중해세계로의 진출을 꾀하여 그리스 사회와 충돌하였다(페르시 전쟁, 기원전 492, 490, 485). 폴리스들은 단합하여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 냈으며, 전제적인 오리엔트 체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그리스 체제가 승리했음을 자부했다. 특히 해군력인 강했던 아테네는 종전 후 그리스 사회의 패권을 장악하여,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아테네는 그 기금으로 민회 참여자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등 내부적인 민주화와 복지를 꾀했다. 특히 페리클레스시대(기원전 457~429)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혹자는 이를 아테네의 제국주의로 파악하기도 한다.

 

아테네의 독주는 스파르타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의 전체적인 내분, 곧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을 초래했다. 그리스 세계는 소모적인 전쟁 속에서 침체와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급기야 기원전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 들어가고 말았다.